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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4.3을 마주하는 두 개의 시선 『작별하지 않는다』(한강) vs 『지슬』(김금숙)

by wiseman22 2025. 4. 3.

김금숙 작가의 지슬

 

당신은 제주4.3사건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요?
국가가 자국민을 향해 총을 들이댄 그날들,
산으로 도망친 이들을 ‘폭도’라 부르며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고요하고 아름다운 섬에서, 봄의 들꽃 아래 묻혀버린 죽음들이 있었습니다.

제주4.3사건은 1948년 4월 3일을 전후로 하여 1954년까지,
제주도 내에서 발생한 무장봉기와 이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민간인 수만 명이 희생된 비극입니다.
당시 국가는 공포 정치 속에 '빨갱이'라는 낙인을 무차별적으로 남발했고,
단지 산속으로 피했다는 이유만으로, 혹은 가해자들과의 연관이 없었음에도 수많은 주민이 총살되고 불태워졌습니다.

그로부터 70여 년이 지났지만, 그날의 총성은 아직 바람 속에 남아 있고,
무덤도 없이 사라진 이들의 영혼은 여전히 섬의 안개 속을 떠돕니다.
오랫동안 입을 닫고 살아야 했던 생존자들은 더디게나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고,
그 침묵을 문학과 예술이 대신 기억하려 하고 있습니다.

한강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김금숙의 『지슬』은
그 기억을 예술로 되살린 작품입니다.
이 두 작품은 각기 다른 언어, 다른 도구, 다른 형식을 사용하지만,
동일한 목적을 지니고 있습니다. 제주4.3의 진실을 알리고, 잊히지 않게 만드는 것.

이 글은 두 작품을 비교하며, 제주4.3을 잘 모르는 독자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더 가깝고 따뜻하게, 그러나 뼈아프게 전하고자 합니다.

[문장으로 묻는 고통 - 『작별하지 않는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는,
'산 자의 말'로 '죽은 자의 침묵'을 애도하는 작품입니다.
소설은 소설가 경하와 친구 인선, 그리고 과거에 실종된 여성 정심의 이야기를 축으로 전개됩니다.
한강은 이 소설에서 제주4.3사건을 단지 과거의 한 사건이 아닌,
지금 우리 사회와 개인에게 여전히 영향을 미치는 고통의 구조로 바라봅니다.

경하는 4.3의 기억을 기록하는 인물이며, 인선은 그 기억에 몸을 던져 들어가는 존재입니다.
정심은 과거로부터 사라졌지만, 그녀의 존재는 여전히 이들의 삶에 유령처럼 남아 있습니다.
한강은 이 인물들을 통해 ‘기억의 전염성’, ‘고통의 유전’을 보여줍니다.

작품 전체에는 죽음을 직접 묘사하는 장면보다, 죽음을 둘러싼 정적과 상징이 더 많이 등장합니다.
가령, 불타는 마을을 피해 산으로 올라가던 정심의 행로, 산비탈에서 발견된 시신이 쥐고 있던 나뭇가지,
새벽녘의 안개 속을 걷는 인선의 모습 등은 단어 하나하나가 깊은 애도와 슬픔을 머금고 있습니다.

“그녀의 시신이 산비탈에서 발견되었을 때, 한쪽 손에는 부서진 나뭇가지를 꼭 쥐고 있었다.”

 

이 문장은 단순한 묘사가 아닙니다. 죽음 직전까지 삶에 매달렸던 손, 그리고 자연의 일부로 돌아간 인간.
그 나뭇가지는 생의 마지막 저항이자, 자연 속에 묻힌 인간의 마지막 흔적이 됩니다.

한강은 소설을 통해 독자에게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별을 끝내지 못하고 있는가?”
“기억하지 않음으로써, 또 다른 폭력을 되풀이하고 있는 건 아닌가?”

『작별하지 않는다』는 이 질문을 우리 손에 쥐어주고는, 아무 말 없이 독자를 사건의 중심으로 밀어넣습니다.
그리고 책을 덮고 나서야, 우리는 뒤늦게 그 질문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림으로 남은 슬픔 - 『지슬』]

김금숙 작가의 그래픽노블 『지슬』은
영화 '지슬'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지만, 또 하나의 독립된 예술로 존재합니다.
‘지슬’은 제주 방언으로 ‘감자’를 의미합니다.
땅속에 묻혀 자라는 감자처럼, 목소리 내지 못하고 땅 아래 숨어야 했던 민간인들의 운명을 상징합니다.

작품은 1948년 당시 동굴 속에 피신한 11명의 마을 주민들을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군경 토벌대의 소탕 작전이 시작되며, 마을은 불타고, 주민들은 죽임을 당하고, 남은 사람들은 산속 동굴에 몸을 숨깁니다.
하지만 그 동굴조차도 그들을 지켜주지 못합니다.

『지슬』은 말보다 이미지가 중심인 작품입니다.
김금숙 작가의 그림은 단순하지만 강렬합니다. 흑백의 대비, 무표정한 얼굴들, 표현되지 않은 눈동자.
이 모든 요소들이 합쳐져 하나의 정적이자 슬픔으로 읽히며, 페이지마다 긴장이 맴돕니다.

특히 작품 속 인물들이 아무 말 없이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 동굴 속에서 움츠리고 있는 가족들,
총성이 울린 뒤 멈춰버린 시간 속에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은
이야기를 모르는 이에게도 직관적인 감정 전달을 가능하게 합니다.

작품은 독자에게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보게’ 하고, ‘느끼게’ 합니다.
이것이 『지슬』의 힘입니다. 설명하지 않고, 해설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 그림들을 통해 그날의 두려움과 고통을 직접 느낍니다.

『지슬』은 제주4.3을 단순히 고발하거나 다큐처럼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존재 자체의 존엄과 상처를 그려낸 작품입니다.
그래픽노블이라는 형식이 얼마나 강력한 감정 전달 도구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다르게, 그러나 함께 기억하기 위한 예술]

『작별하지 않는다』와 『지슬』은 각기 다른 형식으로 제주4.3을 말합니다.
한 작품은 문장으로, 다른 하나는 그림으로.
한 작품은 산 자의 고요한 애도이며, 다른 하나는 죽은 자의 침묵을 대신 전하는 시선입니다.

두 작품 모두 공통적으로 “기억”을 이야기합니다.
망각의 시대에 기억하려는 노력, 과거의 폭력을 외면하지 않으려는 용기.
그것이 문학과 예술의 역할이라고 믿는 작가들의 절절한 태도가 이 작품들 속에 담겨 있습니다.

“당신은 그날을 알고 있나요?”
“당신은 이 비극 앞에서 어떤 태도를 취할 것인가요?”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단순한 독자가 될 수 없습니다.
『작별하지 않는다』는 독자에게 침묵의 무게를 안겨주며, 『지슬』은 그 고요 속의 비명을 듣게 합니다.

[제주를 기억하는 오늘의 당신에게]

제주4.3은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날 죽어간 이름들은 여전히 기록되지 않았고,
그들의 무덤조차 찾지 못한 유족들은 오늘도 싸우고 있습니다.
기억은 과거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이며, 미래를 바꾸는 힘입니다.

한강 작가의 『작별하지 않는다』와 김금숙 작가의 『지슬』은
제주4.3을 이해하는 문이 되어 줍니다.
하나는 당신의 손을 잡고 글 속으로 이끄는 조용한 안내자이고,
다른 하나는 아무 말 없이 그림 속을 바라보게 만드는 침묵의 증인입니다.

이제는 당신의 차례입니다.
그날의 제주를 마주한 사람으로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이 기억을 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작별하지 않는 연대입니다.